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(문단 편집) ===== 철거 반대 ===== 당시 철거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았다. 반대 측의 견해는 크게 다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. * [[삼전도비|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]] [[아우슈비츠|보존의 가치가 있다.]] * [[대한민국]] 중앙청으로 존재한 기간(34년)이 [[일제강점기]] [[조선총독부]]로 존재한 기간(17년)보다 월등히 길며, [[대한민국 정부]]의 공간으로서 상징성이 높은 건물이다. *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해야 한다면 [[서울역]], [[한국은행]], 서울대학교[* [[경성제국대학]] 9개의 전문학교들을 통합해서 서울대를 설립했다.](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, 서울과기대) 등 [[일제강점기]]에 건설한 무수히 많은 [[적산|건물]]도 철거해야 하고 도로, [[철도]], [[공항]], 비행장, [[댐]], 상하[[수도]] 등 대다수도 일제의 수탈 및 대륙 침략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므로 헐어야 한다.[*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부러 경복궁 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데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었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만으로 철거가 결정된건 아니었다.] * [[대한제국|군주제]]가 폐지된 [[대한민국]]에서 궁궐 특히 [[경복궁]]을 복원해봤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.[* [[경복궁]]은 법궁은 [[법궁]]이었으되 이미 [[임진왜란]] 전부터 외교적 행사 등에만 주로 쓰였고 사실상 주요 정무는 [[창덕궁]] 등에서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.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수백 년간 불탄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고, [[흥선대원군]] 때 중건되어 실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,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 본래 원형과는 차이가 많다. 왜란 이전의 경복궁은 기와도 청자 기와를 사용했고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3&oid=001&aid=0003642017|#]] 세부적인 부분도 조선 초의 경복궁과 간극이 크다.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원될 경복궁에 비해 총독부가 더 가치가 높느냐 하는 것은 별개 이야기.] 전 [[월간조선]] 편집장 [[조갑제]]의 주장에 따르면 [[김대중]]은 철거에 반대했다고 한다. 당시에도 김대중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.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해 [[영국]]으로 유학을 갔다가 막 돌아와 있던 김대중은 중앙청 철거에 명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. 그것을 철거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 파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. [[http://www.chogabje.com/board/view.asp?C_IDX=12020&C_CC=BJ|출처]] 당시 김대중을 인터뷰했던 조갑제 기자는 "김대중이 명확히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, 현직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을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, 인터뷰 교정 과정에서 김대중이 '해당 내용을 삭제해달라'고 해 기사화되지 않았다"고 증언했다. 철거 입안 후 1993년 10월 5일에 한국고고학회, 영남고고학회, 호남고고학회 3개 단체가 "구 총독부 철거는 새 [[국립중앙박물관]] 건물 다 지은 뒤에 해야 한다."며 온건하게 '선 건립, 후 철거'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3100500289111001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3-10-05&officeId=00028&pageNo=11&printNo=1693&publishType=00010|주장을 내세웠지만,]] 광복회 등이 주축이 된 '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촉진 위원회' 측에 의해 '민족 반역자 집단'이라고 공격받았다. 이리하여 양측은 연일 성명서를 발표해 대립각을 내세웠다. 또 11월 10일 '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및 유물 전시장 변경에 관한 공청회 및 설명회'에서도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3111300289109003&editNo=4&printCount=1&publishDate=1993-11-13&officeId=00028&pageNo=9&printNo=1730&publishType=00010|유사한 일]]이 벌어졌다. 이후 1995년 8월에는 일부 [[서울특별시]] 시의원들이 [[서울시의회]]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<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>을 제출하기도 했으며, 1996년 6월에는 '[[국립중앙박물관]]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'이 서울지방법원에 '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'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. 강원용 목사도 경향신문에 철거 반대 주장을 기고했고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120200329105002&editNo=20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12-02&officeId=00032&pageNo=5&printNo=15272&publishType=00010|#]] 일부 신문은 사설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으며, [[조선일보]]는 4컷 만화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. 20세기 초 [[아시아]]의 주요 건축물이란 가치를 들어 한국 건축계는 거의 일치단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철거에 반대했으며, 적어도 이전이라도 해서 복원하길 바랐다. 건축가 [[승효상]]은 해체 결정에 대해 배타적 국수주의, 문화적 편협성, 반문화적 폭거, 천민 문화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. [[https://www.joongang.co.kr/article/351109|#]] [[승효상]]은 이때 [[천민]] 문화주의 운운하며 비난한 탓에 '외세가 강제로 지은 건물을 지키는 넌 잘났으니 [[양반]] 문화주의라고 하는 거냐?'는 비난을 받았다. 그리고 이런 비난 속에 당시 그에게 건축 관련 주문을 한 사람들까지 대거 그에게 보이콧하고 주문을 취소하는 등 건축 의뢰까지 대폭 줄어 경제적 피해를 봤다. 하지만 그는 지금도 아쉬워하고 그때 그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. 건축계는 당연히 건축 철거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, 한국의 고도 성장으로 인한 근대 건축 유산의 무분별한 파괴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한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. 한편 중앙청은 일본인 관광객들에겐 필수 코스였다. 일본인들이 한국에 놀러오면 이 곳에 들러 자신들의 '[[일본 제국|자랑스러운]]' 역사를 확인하고 갔다.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일본 [[가고시마현|가고시마]]의 한 정치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했을 때 그의 집에 조선총독부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있었고 거기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.[* 자신이 한국 정치인을 초대해 놓고도 그 사진을 치우지 않았다는 건 일부러 보라고 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.] 또한 야당 총재 시절에도 중앙청에 갔을 때 일본에서 [[수학여행]]을 온 학생들이 중앙청을 배경으로 자랑스레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, 중앙청을 최소한 그 위치에서는 없애야 한다고 마음 먹은 모양이다.[[https://web.archive.org/web/20111119160811/http:/www.sdjs.co.kr/read.php?quarterId=SD200704&num=155|인터뷰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